우춘방 원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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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엽풍란- 부귀란 Neofinetia falcata Hu

학명:부귀란(富貴蘭)
<<부귀란의 역사>>
강호 원예문화로까지 소급하게 되는데 특히 11대장군 가제공(家齊公:1773~1841)이 대단한 애호자라고 하는데 강호성내에 수집된 부귀란은 금,은의 망으로 덮어두고 가까이 가서 구경할 때는 일본도의 감상과 마찬가지로 숨쉴 때 입김이 걸치지 않도록 입을 회지로 막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대명들도 자기 지방에서 풍란의 변이종을 찾는데 열을 올려서 장군에게 헌상 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로 부귀란 애호자가 상류사회로 퍼져나가서 각지에 애호회가 생기고 씨름의 심부를 본따서 명감이 발행된 것이다.
부귀란의 아명은 이 시대에 붙여져서 “부귀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란“의 뜻으로 상류계급만이 즐기는 원예였던 것이다. 이때가 제1기 붐이다.제2기 붐은 소화에 들어와서 시작되고 전쟁이 시작되는 소화18년까지라 할 수 있다.
소화14년에는 각지의 부귀란애호회가 하나로 뭉쳐 대일본부귀란연합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부귀란의 가격은 매우 고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귀한 품종을 사들이면 요정에서 주식을 제공하고 피로연을 배풀어 구경시켰다고 하는 것이다.
패전 후 각지에서 작은 모임들이 있었지만 그저 그렇게 계속되던 것이 소화48년 일본부귀란회와 근기부귀란회가 주최하고 일본장생란연합회가 공최해서 풍란미술전이 대판의 차구산본전 요정에서 개최되었다. 참여한 수지바가 200명, 부귀란도 수백분에 이르고 관동에서도 구주에서도 애호자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 것인데 이때부터 부귀란 인구가 늘어나기 시자가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제 유상의 원예라고 하던 부귀란도 품종의 개체수도 늘어나서 전문점에서 뿐만 아니라 통신판매로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산야에 자생하는 풍란을 채취해서 취미감상의 원예식물로 재배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 일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원복11년(1698)에 간행된 패왼익헌의 화보가 있다. 그 1절에 오잡조,복주부지등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으로 풍란의 생태 재배법,약효 등이 소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풍란은 높은 나무에 기생하고 그 뿌리는 땅에 닿지 않는다. 이것을 따서 종려나무의 털로 엮어서 나무 밑이나 선반 밑에 걸어두고 때때로 물을 부어준다.
물 속에 담궜다 꺼내도 좋다. 냉차를 뿌려 주면 잘 자란다. 그 꽃은 황백색으로 란을 닮았다. [난산하는 사람에게 이것을 걸어주면 순산하게 된다.]등 관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약용 식물로 재배한 것 같다. 안정2년(1855)의 충란견입경에는 조금 어설픈 디자인이지만 118품종이 게재되어 있는데 그 중 27품종이 일품물이라 하니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응2년(1866)에 발행된 부유란경경에는 101품종이 게재되어 있고 그중 24품종이 일품기품으로서 별도로 취급되여 있다.
이렇게 산채품이 증식 되어 자리를 잡아가고 잘 알려진 품종에서 새로운 변이종이 나오기도 하면서 취미인들을 웃기고 울리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풍란은 둔갑을 한다. 둔갑해서 출세한다.] 라고 한다. 무지에서 무늬가 나오고 호에서 복륜, 중투로 변한다. 때로는 복륜에서 역복륜으로 바뀌고 잎 모양도 장단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변하는 등 이런 생각지도 못한 변용변상이야 말로 풍란원예의 묘미라 할 수 있다.